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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저자
    카를로 로벨리 지음 ; 이중원 옮김
    출판사
    쌤앤파커스
    발행연도
    2019
    작성자
    김*종
    작성일
    2025.06.26
    평가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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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카를로 로벨리 지음.이종원 옮김. 샘앤파키스 출판

    저자는 204쪽에서 이렇게 썼다. “이 책에 실린 내용 중 많은 부분은 믿을 만하고, 다른 부분은 그럴듯하고, 다른 부분은 아직 추측이어서 오해할 위험이 있다” 역자인 이종원은 옮긴이의 글에서 “현재 양자중력 이론은 오직 이론적 상상을 통해 우주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할 뿐이며, 아직까지는 어떤 실험적 증거도 갖지 않고 있다. --매우 그럴듯하며 흥미진진한 상상이자, 물리학의 미개척 분야에 대한 새로운 도전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라고 적고 있다. 저자가 연구한다는 루프 양자중력은 양자중력 이론의 대표적인 이론 중 하나라고도 한다. 이외에도 양자중력 이론은 많은 갈래가 있는 모양이다. 언제나처럼 논쟁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의 원제는 ‘THE ORDER OF TIME’이고 ‘시간의 질서’라고 번역하는 게 타당해 보이는데, 한국에서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로 번역되었다.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할만한 능력이 안 되니 읽으면서 받은 느낌만을 몇 자 적어 본다. 순전히 ‘느낌’이기에 신뢰할 만한 내용은 전혀 없다. 뉴턴의 중력이론에서 시작하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이제 양자중력이론으로 발전해 가는 모양이다. 이 발전은 기존의 이론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 혹은 ‘사건’이 발견되기에 새롭게 갱신한다. 뉴턴은 절대적 시간이나 절대적 공간을 제시하였고,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이 상대적이라고 한 듯 하다. 상대적인 이유는 우주를 말랑한 젤리 같은 것으로 보고 그 젤리 덩어리가 휘거나 움직일 때 시공간도 변한다고 하는 듯하다. 젤리 같은 것을 중력장이라고 표현하는 듯하다. 양자이론은 우주가 중력장이 아니라 알갱이로 구성되었고, 이 알갱이 같은 것이 관계에 의해 뭔가가 즉 ‘사건’이 발생한다고 하는 듯하다. 이 알갱이 같은 것을 양자라 하는 모양이다. 양자는 물리량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한다. ‘시간’은 단지 양자의 충돌에 의해 발생하는 하나의 사건일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주에는 시간이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다고 한다. 사건은 우연한 계기에 의해 생기기 때문이다. 저자는 시간을 생성하는 것이 엔트로피의 작용이라고 하는 듯하다.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 과거이고 높은 상태가 미래라고 한다. 좀 더 추가하면 엔트로피가 낮다는 것은 질서가 잡히고 오랫동안 단단한 구조물로 존재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돌 같이 딱딱한 고체는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다. 엔트로피가 낮았기에 흔적을 남긴다고 한다. 그것이 과거라고 일컬어진다. 과거는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엔트로피가 증가를 우리는 미래라고 부른다고 한다. 증가할 때는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미래는 불확정적이다. 해서 우리는 남겨진 흔적에서 불확정적인 방향으로 시간이 흘러간다고 착각을 한다고 하는 듯하다. 즉 과거는 흔적이 있기에 과거라고 하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상태를 미래라고 부른다는 의미다. 흔적과 기억이 있기에 그것을 과거라 여기고, 과거가 있기에 미래로 나아간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관점의 효과일 뿐이라고 한다. “사물의 배열은 하나의 물리계가 나머지 세상과 상호 작용할 때, 그 상호 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저자는 시간을 물질로 즉 하나의 사물로 본다. 우리가 과거니 미래니 하는 것은 단지 하나의 사물의 배열일 뿐이라고 한다. 하여 “열평형 상태나 순수한 기계 시스템에서는 인과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시간의 방향이란 없다” 여러 가지 우연한 상호작용에 의해 우연히 생기는 것이 ‘시간’이다. 어쩌면 시간도 하나의 ‘물질’이나 ‘양자’일 뿐이고 하는 듯도 하다.

    시간은 ‘절대적 시간’이라는 왕좌에서 이제는 여러 사건 중의 하나의 ‘우연한 사건’이 된 꼴이다. 뉴턴은 엄밀한 수학자라는 느낌이라면 저자인 카를로 로벨리는 명상가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불교의 ‘인연’이나 ‘연기의 법칙’을 연구하는 참선가 같다.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그것도 없다. 이것이 생김으로써 그것이 생기고----”하는 연기의 법칙. 뉴턴은 딱딱한 삼각자를 가지고 우주를 관찰했다면, 아이슈타인은 말랑한 삼각자를 가지고 했고, 카를로 로벨리는 명상을 통해 우주의 리듬과 운동을 느끼려고 하는 듯하다. 엉뚱한 생각이지만, 나중에 여건이 되면 하루 중 여러 시간을 ‘명상’을 하며 보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선을 하는 스님들을 보면 몇 시간이고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정지’는 인간의 관점일 뿐이다. 정지해 있는 동안에도 지구와 우주는 엄청난 속도로 돌고 있고 팽창하고 충돌하는 ‘사건’의 연쇄다. 어쩌면 명상이란 내 자신을 돌아보고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리듬과 운동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만화처럼 표현하면 이들은 가만히 앉아서 우주의 ‘사건’을 관람하는 영화광이 아닐까. 혹시 모르지 않는가. 지겨움과 무료함을 느낄 시간도 없을지도.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이든 무한대로 생각하거나 상상해도 된다. 시간은 지속하지 않고 흐르지도 않고, 우주에는 시간이 없고, 혹 시간이 있는 곳이 있다면 우연한 계기 때문이고, 시간은 하나의 ‘사건’일 뿐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뭔들 못하겠는가?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지만 고통이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참 이상한 동물이다. 제 한 몸의 생존과 안녕만을 원하면 되지, 그것들과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우주’ 따위에 관심을 갖고 있다. 위대한 종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특이한 종인 것은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인간의 관점이라면 어떨까? 그러니까 이 ‘우주’는 인간의 그런 취미활동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우주적 시각으로 보면 고양이의 특이점과 인간의 특이점은 아무런 가치의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둘 다 우연한 사건일 뿐이다. 뉴턴의 ‘절대적 시간’이 오류로 판정이 나고, 상대성이론이 의심받고, 양자중력이론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하여도, 아직까지 인간의 삶은 뉴턴의 ‘절대적 시간’ 안에서 조직될 수밖에 없지 않을가. 아니 ‘시간’ 안에서, 적어도 시간이 절대적 변수가 아닐까. 인간의 특별한 특권이 아니라 특징이다. “시간은 우리를 세상의 일부와 접하게 해준다. 그러니까 시간은, 본질적으로 기억과 예측으로 만들어진 뇌를 가진 인간이 세상과 상호 작용을 하는 형식이며, 우리 정체성의 근원이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문법 안에 있는 종이다.그것도 우연한 ‘사건’에 의해 생겼다면, 마치 고양이의 다른 특성과 마찬가지로. 만일 인간을 둘러싼 화학적 성질이 변하거나, 양자(물리양) 변동이 있거나 충돌(인연이 변하면)이 생기면 우리도 ‘시간’이라는 물질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것은 아닐까? 마치 스마트폰이 인간의 삶의 양태를 변모시켰듯이. 양자 과학으로 인간의 사회가 직조된다면 우리에게도 ‘시간’이 희미한 유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가. 그때도 우리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지만 아직까지 발생한 사건이 아니기에 있음 직한 범위 내에서 생각해 보자. 기술이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양자 우주론이 하나의 사상이라면 이 사상이나 인식이 우리와 무슨 상관일까? 과학에서 유력한 위치를 차지해가고 있다는 양자이론를 받아들이는 태도와 자세와 뉴턴의 ‘절대적 시간’을 고수하는 사람과의 차이점은 무엇일가. 하는 질문정도는 던져볼 수 있으리라 본다. 저자는 묻는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어쩌면 관계와 사건들의 총체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실체’가 아니다. 마치 ‘자아’는 없다고 하는 듯하다. “스스로 주체라고 생각한 경험은 일차적인 경험이 아니다. 복합적인 문화의 산물이다” 저자는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에서 현자의 대답을 인용한다. 음미해 볼만하여 그대로 옮겨본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데도 살아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불멸의 존재인 것처럼 산다”

    “내게 삶, 이 짧은 삶은 감정들의 끊임없는 외침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아름답고 찬란한 외침인 것이다. 이 외침은 때로는 고통이 되고 때로는 노래가 된다”
    삶에 유일한 가치가 있다면 삶 그 자체다. 삶의 의미가 아니고, 과거의 영광도 미래의 희망도 아니다. 인연을 알고 순간을 살아가고 사랑하자.

  • 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
    저자
    성해나 지음
    출판사
    위즈덤하우스
    발행연도
    2025
    작성자
    전*윤
    작성일
    2025.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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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고하게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시간이라는 세월에 덧없이 무너질 순간에도 우리는 언제나 덧없음을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워하고 있다. 그리움은 일종의 애정이며, 그 애정이 충족되었든 충족되지 못하였든 삶이 다 할 때까지 계속해서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것. 그렇기에 이는 삶과 같고, 삶은 집과도 같다. 금이 가고 약해졌다고 해서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그 집이 지니고 있던 추억과 시간을 존중해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약해졌다고 해서 포기하고 주저 앉는 것 대신 다시 일어나 시도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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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임선우 지음
    출판사
    위즈덤하우스
    발행연도
    2024
    작성자
    전*윤
    작성일
    2025.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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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에 또 만나."
    이 만남이 이번으로 끝이 아니라 더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는 인사말. 우리는 이어지고 싶어한다. 그게 나와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일 지라도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져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으면 한다. 타인의 행복과 안온함을 바라는 마음. 누군가는 그것을 모성애라고 칭하지만 모성애보다 더 근원적이고 위대한, 그러나 아주 작고 사소한 그 바람이 누군가의 앞길에 조그만 풀꽃 하나라도 심어줄 수 있다면 어떨까. 죽음과 탄생을 반복하면서까지 널 만나고 싶다는 그리움, 네가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무엇일까.

  • 시절과 기분
    저자
    김봉곤 지음
    출판사
    창비
    발행연도
    2020
    작성자
    전*윤
    작성일
    2025.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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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업과 입학을 반복하는 것처럼 사랑도 시작과 이별을 반복한다.
    반복되는 모든 것들에 마음을 주지 않을 수는 없으나, 모든 것들에 전부를 걸 필요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알아갈 것이다. 나와 다른 너와 나가 우리라는 이름으로 묶여 '나라면 하지 않았을 것들'을 계속 곱씹는 일. 곱씹다 못해 이가 다 마모되어 사라질 지 언정 너를 이해하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하염없이 벼랑으로 내몰아가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랑은 영원하지 않으며 언젠가 끝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일. 그것이 사랑이며,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반복해야 할 최악의 행위이자 최고의 행위라는 것을 보여준다.

  • 이완의 자세 : 김유담 소설
    저자
    김유담 지음
    출판사
    창비
    발행연도
    2021
    작성자
    전*윤
    작성일
    2025.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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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언가를 받아들이려거든 몸의 긴장을 풀어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소설이다. 행복이든, 좌절이든, 실패든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감정과 생각,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배출해낸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삶에서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더 없이 충만한 결과를 얻어내기도 하지만, 살면서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는 최악의 결과를 얻어낼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런 최악의 결과라는 바다 속에서도 헤엄쳐야만 한다. 콧구멍과 입구멍이 있는 한, 우리의 기도가 개폐를 멈추지 않는 한 우리는 이 험난하고 무서운 세상을 헤엄쳐야 하기 때문이다. 가만 고여있는 물에 몸을 맡기고 긴장을 풀어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다른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가장 필수적인 첫머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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