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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학의 자리 : 정해연 장편소설
    저자
    정해연 지음
    출판사
    엘릭시르
    발행연도
    2021
    작성자
    전*윤
    작성일
    2025.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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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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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말한다. "여전히 나의 1순위는 재미다."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재미'가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독하게 불쾌한 작품. 그 이유는 이 작품이 늙은 선생과 어린 학생의 성관계를 다루고 있어서 인지, 어린 학생을 제 손아귀에 넣고 맘대로 주무르는 어른의 행태 때문인지, 자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을 도구 취급하는 사람들의 행태 때문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이 작품은 너무도 불쾌하고 최악의 형태로 그려진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이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이유가 단순히 자극적인 소재 때문이라면, 상상도 못할 그 반전 때문이라면 더더욱 이 작품은 내가 읽었던 그 모든 작품 중 최악의 작품으로 남을 것이다. 선생과 미성년자의 부적절한 관계를 '반전'이라는 말로 개연성을 받으려 한 작가의 행태가 너무 실망스럽다.

  • 가을철 한정 구리킨톤 사건. 상
    저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 김선영 옮김
    출판사
    교유서가
    발행연도
    2017
    작성자
    전*윤
    작성일
    2025.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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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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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부터 시작된 사계절의 절반이 지나가고 다가온 가을의 이야기. 둘이 함께였던 것이 당연했지만, 그 당연함을 뒤로 하고 각자 살아가기로 마음 먹은 한 학기 동안 그들의 소시민적 행위들이 돋보임. 그러나 극 대부분에 걸쳐 둘은 결코 소시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듯 언제라도 사건이 터질 것만 같은 긴장감이 깔려있음. 그 긴장감은 서로의 연인으로 인해 격정을 맞이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자연스럽게 소멸되어 본래의 형태를 되찾음. 소시민으로서 평범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은 둘이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함. 둘은 서로에 의해 존재하며, 서로에 의해 파괴되는 아이러니한 관계성을 지니고 있음.

  •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 사건
    저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 김선영 옮김
    출판사
    엘릭시르
    발행연도
    2016
    작성자
    전*윤
    작성일
    2025.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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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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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시리즈와는 달리 긴박하고 흥미진진한 사건과 전개로 이뤄짐. 오나사이와 고바토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시즌이었다고 생각함. 특히 오나사이의 조금은 뒤틀린 듯한 성격과 특성을 잘 이끌어냈으며, 둘이 왜 소시민이 되고자 하는지에 대해 독자에게도 다시금 부각시켜줌. 소시민이 되고자 서로를 다독이며 지냈던 둘이 헤어진 이후, 둘은 진정 소시민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될지, 아니면 자신의 특성을 억누르지 못하고 소시민 답지 않은 행동을 계속할지에 대한 궁금증이 유발되며 다음 시리즈가 기대가 됨.

  • 여름철 한정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 = Special tropical parfait case
    저자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 김선영 옮김
    출판사
    엘릭시르
    발행연도
    2019
    작성자
    전*윤
    작성일
    2025.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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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공감수

    자연스레 눈에 그려지는 전개와 소시민이 되고자 하는 두 비범한 아이들의 사건들은 흥미롭게 진행된다. 그러나 담담하게 서술되어지는 1인칭 시점의 이야기와 추론, 추리하는 것에 특화된 주인공이라는 특성을 잘 살리지는 못한 채로 끝이 나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소시민이 되고자 하는 아이들의 욕망이 반영된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나, 독자의 시선을 단번에 확 끌어당기지는 못하는 것 같다.

  •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저자
    카를로 로벨리 지음 ; 이중원 옮김
    출판사
    쌤앤파커스
    발행연도
    2019
    작성자
    김*종
    작성일
    2025.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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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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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카를로 로벨리 지음.이종원 옮김. 샘앤파키스 출판

    저자는 204쪽에서 이렇게 썼다. “이 책에 실린 내용 중 많은 부분은 믿을 만하고, 다른 부분은 그럴듯하고, 다른 부분은 아직 추측이어서 오해할 위험이 있다” 역자인 이종원은 옮긴이의 글에서 “현재 양자중력 이론은 오직 이론적 상상을 통해 우주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할 뿐이며, 아직까지는 어떤 실험적 증거도 갖지 않고 있다. --매우 그럴듯하며 흥미진진한 상상이자, 물리학의 미개척 분야에 대한 새로운 도전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라고 적고 있다. 저자가 연구한다는 루프 양자중력은 양자중력 이론의 대표적인 이론 중 하나라고도 한다. 이외에도 양자중력 이론은 많은 갈래가 있는 모양이다. 언제나처럼 논쟁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의 원제는 ‘THE ORDER OF TIME’이고 ‘시간의 질서’라고 번역하는 게 타당해 보이는데, 한국에서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로 번역되었다.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할만한 능력이 안 되니 읽으면서 받은 느낌만을 몇 자 적어 본다. 순전히 ‘느낌’이기에 신뢰할 만한 내용은 전혀 없다. 뉴턴의 중력이론에서 시작하여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이제 양자중력이론으로 발전해 가는 모양이다. 이 발전은 기존의 이론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 혹은 ‘사건’이 발견되기에 새롭게 갱신한다. 뉴턴은 절대적 시간이나 절대적 공간을 제시하였고, 아인슈타인은 시공간이 상대적이라고 한 듯 하다. 상대적인 이유는 우주를 말랑한 젤리 같은 것으로 보고 그 젤리 덩어리가 휘거나 움직일 때 시공간도 변한다고 하는 듯하다. 젤리 같은 것을 중력장이라고 표현하는 듯하다. 양자이론은 우주가 중력장이 아니라 알갱이로 구성되었고, 이 알갱이 같은 것이 관계에 의해 뭔가가 즉 ‘사건’이 발생한다고 하는 듯하다. 이 알갱이 같은 것을 양자라 하는 모양이다. 양자는 물리량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한다. ‘시간’은 단지 양자의 충돌에 의해 발생하는 하나의 사건일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주에는 시간이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다고 한다. 사건은 우연한 계기에 의해 생기기 때문이다. 저자는 시간을 생성하는 것이 엔트로피의 작용이라고 하는 듯하다.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 과거이고 높은 상태가 미래라고 한다. 좀 더 추가하면 엔트로피가 낮다는 것은 질서가 잡히고 오랫동안 단단한 구조물로 존재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돌 같이 딱딱한 고체는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다. 엔트로피가 낮았기에 흔적을 남긴다고 한다. 그것이 과거라고 일컬어진다. 과거는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엔트로피가 증가를 우리는 미래라고 부른다고 한다. 증가할 때는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미래는 불확정적이다. 해서 우리는 남겨진 흔적에서 불확정적인 방향으로 시간이 흘러간다고 착각을 한다고 하는 듯하다. 즉 과거는 흔적이 있기에 과거라고 하고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상태를 미래라고 부른다는 의미다. 흔적과 기억이 있기에 그것을 과거라 여기고, 과거가 있기에 미래로 나아간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관점의 효과일 뿐이라고 한다. “사물의 배열은 하나의 물리계가 나머지 세상과 상호 작용할 때, 그 상호 작용에 의해 결정된다” 저자는 시간을 물질로 즉 하나의 사물로 본다. 우리가 과거니 미래니 하는 것은 단지 하나의 사물의 배열일 뿐이라고 한다. 하여 “열평형 상태나 순수한 기계 시스템에서는 인과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시간의 방향이란 없다” 여러 가지 우연한 상호작용에 의해 우연히 생기는 것이 ‘시간’이다. 어쩌면 시간도 하나의 ‘물질’이나 ‘양자’일 뿐이고 하는 듯도 하다.

    시간은 ‘절대적 시간’이라는 왕좌에서 이제는 여러 사건 중의 하나의 ‘우연한 사건’이 된 꼴이다. 뉴턴은 엄밀한 수학자라는 느낌이라면 저자인 카를로 로벨리는 명상가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불교의 ‘인연’이나 ‘연기의 법칙’을 연구하는 참선가 같다.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그것도 없다. 이것이 생김으로써 그것이 생기고----”하는 연기의 법칙. 뉴턴은 딱딱한 삼각자를 가지고 우주를 관찰했다면, 아이슈타인은 말랑한 삼각자를 가지고 했고, 카를로 로벨리는 명상을 통해 우주의 리듬과 운동을 느끼려고 하는 듯하다. 엉뚱한 생각이지만, 나중에 여건이 되면 하루 중 여러 시간을 ‘명상’을 하며 보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선을 하는 스님들을 보면 몇 시간이고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정지’는 인간의 관점일 뿐이다. 정지해 있는 동안에도 지구와 우주는 엄청난 속도로 돌고 있고 팽창하고 충돌하는 ‘사건’의 연쇄다. 어쩌면 명상이란 내 자신을 돌아보고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리듬과 운동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만화처럼 표현하면 이들은 가만히 앉아서 우주의 ‘사건’을 관람하는 영화광이 아닐까. 혹시 모르지 않는가. 지겨움과 무료함을 느낄 시간도 없을지도.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이든 무한대로 생각하거나 상상해도 된다. 시간은 지속하지 않고 흐르지도 않고, 우주에는 시간이 없고, 혹 시간이 있는 곳이 있다면 우연한 계기 때문이고, 시간은 하나의 ‘사건’일 뿐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뭔들 못하겠는가?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지만 고통이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참 이상한 동물이다. 제 한 몸의 생존과 안녕만을 원하면 되지, 그것들과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우주’ 따위에 관심을 갖고 있다. 위대한 종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특이한 종인 것은 부인할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인간의 관점이라면 어떨까? 그러니까 이 ‘우주’는 인간의 그런 취미활동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우주적 시각으로 보면 고양이의 특이점과 인간의 특이점은 아무런 가치의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 둘 다 우연한 사건일 뿐이다. 뉴턴의 ‘절대적 시간’이 오류로 판정이 나고, 상대성이론이 의심받고, 양자중력이론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하여도, 아직까지 인간의 삶은 뉴턴의 ‘절대적 시간’ 안에서 조직될 수밖에 없지 않을가. 아니 ‘시간’ 안에서, 적어도 시간이 절대적 변수가 아닐까. 인간의 특별한 특권이 아니라 특징이다. “시간은 우리를 세상의 일부와 접하게 해준다. 그러니까 시간은, 본질적으로 기억과 예측으로 만들어진 뇌를 가진 인간이 세상과 상호 작용을 하는 형식이며, 우리 정체성의 근원이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문법 안에 있는 종이다.그것도 우연한 ‘사건’에 의해 생겼다면, 마치 고양이의 다른 특성과 마찬가지로. 만일 인간을 둘러싼 화학적 성질이 변하거나, 양자(물리양) 변동이 있거나 충돌(인연이 변하면)이 생기면 우리도 ‘시간’이라는 물질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것은 아닐까? 마치 스마트폰이 인간의 삶의 양태를 변모시켰듯이. 양자 과학으로 인간의 사회가 직조된다면 우리에게도 ‘시간’이 희미한 유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가. 그때도 우리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지만 아직까지 발생한 사건이 아니기에 있음 직한 범위 내에서 생각해 보자. 기술이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양자 우주론이 하나의 사상이라면 이 사상이나 인식이 우리와 무슨 상관일까? 과학에서 유력한 위치를 차지해가고 있다는 양자이론를 받아들이는 태도와 자세와 뉴턴의 ‘절대적 시간’을 고수하는 사람과의 차이점은 무엇일가. 하는 질문정도는 던져볼 수 있으리라 본다. 저자는 묻는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어쩌면 관계와 사건들의 총체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한다. ‘실체’가 아니다. 마치 ‘자아’는 없다고 하는 듯하다. “스스로 주체라고 생각한 경험은 일차적인 경험이 아니다. 복합적인 문화의 산물이다” 저자는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에서 현자의 대답을 인용한다. 음미해 볼만하여 그대로 옮겨본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데도 살아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불멸의 존재인 것처럼 산다”

    “내게 삶, 이 짧은 삶은 감정들의 끊임없는 외침에 불과하다. ----결론적으로 아름답고 찬란한 외침인 것이다. 이 외침은 때로는 고통이 되고 때로는 노래가 된다”
    삶에 유일한 가치가 있다면 삶 그 자체다. 삶의 의미가 아니고, 과거의 영광도 미래의 희망도 아니다. 인연을 알고 순간을 살아가고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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