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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신들의 땅>>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민음사
구체적인 삶에서는 이해할 수 없고 이상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해하고 설명하고 해석하고 범주화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소설을 읽고 친구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그동안 삶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범주화하기 위한 나의 노력이 구체적인 인간들의 삶 앞에서 얼마나 초라한 몸부림이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야 하는 종으로서 해석하고 범주화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구체적인 삶은 그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 역동성과 부조리와 설명할 수 없는 영역임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지 않나 싶다.
우연히 천쓰홍의 소설 <셔터우의 세 자매>를 읽고, 다시 <귀신들의 땅>을 또 읽게 되었다. 소설을 즐겨 읽지 않지만, 천쓰홍은 기회가 되면 또 읽고 싶었다. 작가는 타이완 사람이며 1976년 생이다. 타이완 중부지방의 작은 마을인 용징 출신이다. 이 소설의 배경도 실제 용징이다. 위로 다섯 딸과 아래로 두 아들과 그의 가족 주변인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용징을 귀신들의 땅이라고 하였다. 타이완은 예전부터 귀신에 대한 이야기가 많고, 귀신도 매우 많은 땅이라고 한다. 인간들과 귀신들은 같이 살아가는 땅이다. 배경은 일본 제국주의 지배기에서 장제스의 기나긴 독재 시대를 거쳐 이후, 대만의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 시대의 도래까지다. 타이완은 한국과 비슷한 궤적을 거친 듯 하다. 해방, 전쟁, 군사독재, 산업화 근대화 민주화의 긴 여정을 통과한 나라다. 옮긴이는 타이완을 다중 식민지 국가라고 한다. 17세기부터 네덜란드, 대륙의 유민인 정성공 집단, 일본 제국주의, 국공 내전에서 패전하고 건너온 국민당, 국민당의 장기 집권, 미국의 간접 통치 등 다양한 세력에 의한 압제와 수탈의 식민이 이어졌다고 한다. 타이완은 빈 땅이 아니고, 그곳에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귀신들과 같이 살아 온 고장이었다. 하지만 외부의 세력들에 의해 기나긴 식민화의 역사를 거쳐야 했다. 지금도 타이완은 유엔 가입도 안 되고, 타이완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나라는 드물다고 한다. 늘 미국과 중국 사이의 외교적 갈등의 중심에 놓여 있기도 하는 듯하다. 간간히 들리는 뉴스를 접하다 보면 그 곳 정치의 주요 이슈 중 하나는 중국 본토와 협력할 것인지, 독립을 선택할 것인지라고 한다. 소설의 배경이자, 작가의 고향 용징은 그들 외부 세력이 없을 때부터 살아 온 전형적인 타이완의 전통을 간직한 고장인 듯 하다. 작가는 그곳을 귀신들의 땅이라 칭하여, 타이완의 토속성과 고유성을 이야기하고, 그곳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개인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지금은 잘 들리지 않지만, 한 때 한국인의 정서를 ‘한’이라고 정의 하기도 하였다. 한국이 한의 땅이라면 타이완은 귀신들의 땅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싶다. 타이완을 귀신들의 땅이라고 하는 소설가는 천쓰홍 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옮김이에 의하면 타이완 작가 리앙은 타이완의 귀신들을 정치적, 사회적 산물로 규정하는 데 비해 천쓰홍의 이 소설에 등장하는 귀신들은 이상의 파괴와 욕망의 왜곡, 현실의 부조리성, 사회 구성에서의 메이저와 마이너의 부조화 등 다분히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풍경을 배경으로 생산한다고 평하고 있다. 리앙의 소설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천쓰홍의 소설에 등장하는 귀신에 대한 평에는 공감된다.
천씨 집안은 대대로 용징에서 지주로 부유하게 살았다. 일본 제국주의가 물러나고 장제스의 집권이 시작하면서 토지개혁에 의해 평범한 집안으로 지위가 하락한다. 근대화는 어느 나라나 토지개혁이 반드시 수반되는 듯하다. 천씨 가문의 아들 아산은 아찬과 결혼하고 그들 사이에는 위로 다섯 명의 딸과 아래로 두 명의 아들이 있다. 소설은 이들이 살아가는 구체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궤적을 따라간다. 개인의 운명과 선택과 타이완의 운명과 선택, 세계적 조류에 밀려 이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때론 원하는 것을 얻고 때론 바라는 것과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귀신들의 땅인 용징을 떠나고 싶고, 큰 딸과 넷째만 빼고 귀신들의 땅을 떠난다. 그러나 이들은 귀신들의 땅으로 다시 모인다. 벗어나고 싶고 버리고 싶은 귀신들의 땅을 떠났다가 우연한 계기로 다시 귀신들을 땅으로 돌아온다. 다음 날이면 다시 자신이 살고 있는 곳으로 뿔뿔히 흩어지겟지만, 그들 모두 이곳을 벗어나거나 도망치고 싶지 않은 고향처럼 여길지도 모른다. 소설은 살아있는 인간들 뿐 아니라, 귀신들도 자주 등장하여 그들의 사연과 차마 살아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게 한다. 이 땅은 살아가는 인간들의 땅만이 아니라, 죽은 귀신들의 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후기에서 /누구나 아픈 기억과 상처가 있으면 이를 덮어 버리거나 묻어 버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는 그림자 같고, 지나간 일들은 다시 반복된다. 과거가 있는 한 귀신은 존재한다. 인간 세계 곳곳에 귀신들이 도사리고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귀신인지도 모른다/라고 적고 있다. 귀신은 알 수 없고, 이해 할 수 없고, 형체가 없고, 경계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귀신일지도 모른다. 한강 작가의 소설 <소년들이 온다>도 귀신들을 등장시켜 그들에게 말하게 한다. 이들 작가들은 왜 죽은 자를 소환할까? 윌리엄 포크너는 “과거는 죽지 않았다. 과거는 심지어 지나가지도 않았다”라고 하였고, 소설가 한강은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살렸다”고 하고, 천쓰홍은 우리 모두는 어쩌면 귀신일지 모른다고 한다. 과거를 죽은 자들을 귀신들을, 과거와 죽은 자들과 귀신들과 우리들은 같이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모두는 모든 이상한 것과 같이 살아가야 한다. 이곳은 살아있는 인간들만의 땅이 아니다.
그동안 일상이 바빠 책을 읽지 못했다. 아주 조금씩 이 책만 읽었다. 평소에 소설에 대해 큰 관심이 없지만, 천쓰홍의 소설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 그동안 소설에 대해 흥미를 많이 잃어버린 것은 많은 소설들이 개인의 사소한 일상만을 다루거나, 개인의 심리만을 공략한다는 느낌이었으리라. 대체로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극히 개인적인 그것들을 내가 왜 읽어야 하지 하는 회의였다. 이 소설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짧지만 주문을 하나 만들었다. /살아가는 일은 피곤하고 불편하고 고단하고 무의미한 반복임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살아가면서 늘 만나기 마련인 곤란한 일에 닥칠 때마다 이 주문을 세 번 정도 외우면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나는 왜 행복하지 않는가 하며 자책을 하거나,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정의하여 행복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매진하지 않아도 된다. 삶은 살아 있다는 것은 피곤하고, 불편하고 영원한 반복이 아닐까. 삶을 사랑하는 나는 고통도 불편함도 또한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천쓰홍은 살아있는 인간들에게도 죽은 귀신들에게도 이렇게 말한다. “울지마” “울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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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사람과 부근을 만들기: 그 시작에 대한 탐구>> 샹바오 외 지음. 박우 옮김.글항아리.
“오늘 와서, 내일 떠나지 않는다” 게오르그 짐멜.
샹바오는 ‘부근의 소실’을 다루었고, 이 책에서는 낯선 사람과 부근을 만들기 위한 탐구를 하고 있다.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샹바오는 ‘부근의 소실’을 현대사회, 특히 중국이 현대화되면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의 원인이자, 결과로도 생각한다. 비단 중국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도 혹은 ‘신자유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사회의 단면이 아닐까 싶다. 물론 샹바오는 ‘신자유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거대 담론이나 추상성을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일상어를 사용하여 그것에 대해 탐구한다. ‘개천에 용’ ‘셔터우’ ‘탕핑족’ 등, 한국이라면 ‘흙수저’ ‘헬조선’ ‘이생망’ 등을 다룬다. 아는 사람들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차를 마시거나 음식을 먹을 때 그들을 관찰해 보면 테이블 부근에 위치해 있지만, 모두 핸드폰을 보며 더 멀리 있는 사람이나 사건에 대해 검색하거나 대화를 하는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부근에 있지만, 부근의 소실이며, 익숙한 자이지만 낯선 사람들이며, 구체적인 생활은 이곳이지만, 관심은 저 건너에 있다. 스마트폰이 발명된 이후 흔한 풍경이다. 그러면서 현대인은 철저한 고립감과 우울증을 앓고 있다. 디지털 네트워크는 나를 어디든 데려갈 수 있어 구속없는 새로운 ‘자유’처럼 느껴지지만, 결국 현실에서의 진짜 사회적 교류는 체계적으로 파괴되고 있다. 샹바오의 저서 중, 한국에서 번역 출간된 것은 <주변의 상실> , <경계를 넘는 공동체>, <낯선 사람과 부근 만들기> 세권이다. 나는 <주변의 상실>을 우연히 읽게 되었고, 꽤 감명 깊었다. 물론 지금은 기억나지 않고 ‘방법으로서 자기’라는 말만 기억한다. 두 번째 책이 출판되었는지 알지 못했고, 이번 책은 도서관을 어슬렁거리다 우연히 발견하였다.
샹바오는 ‘부근’이나 ‘낯선 사람’을 탐구하고 있다. 연구자란, 누구도 관심 갖지 않을 ‘일상’을 학문적 대상으로 만들거나 발견하고 탐문하는 자들이 아닐까. 누구나 당연시 대하는 하늘과 땅에서 수의 원리나 도형을 발견하는 수학자와 같다. ‘부근’ 이란. 물리적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생활이나 일상이 일어나는 유무형의 공간, 장소 혹은 추상성이 아니라 구체성이 지배하는 곳, 그냥 부근의 상실을 일상의 상실이나 생활의 부재 정도로 생각해 보자. 한 사람이나 집단이 직접 일상을 살아가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곳. ‘내 앞 500미터’ ‘내 직장 동료’, ‘이웃이나 가족’ 등이 내가 실제 삶을 살아가는 위치다. 샹바오가 보기에 우리는 이런 부근을 상실해 가고 있고, 부근의 소실은 개인과 공동체에 많은 문제를 낳고 있다고 한다. 때로는 부근의 상실을 다른 먼 것으로 보상받으려고 하기도 한다. 낯선 사람은 누구일까? 단순히 모르는 사람을 뜻할까. /이 세상에는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많지만 이들이 나와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것 자체가 근대적 방식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낯선 사람은 적이거나 특별한 손님이었다고 한다. 오늘 와서 내일 떠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근대사회에서는 오늘 와서, 내일 떠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떠나지 않기에 근대 사회는 이들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는 근대적 개인의 탄생과 자유와 민주 제도의 부상과도 맞닿아 있다고 한다. 유럽의 낯선 이들에게 보인 대응은 인류가 20세기에 겪은 혁명과 변혁을 이끄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낯선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현대에서는 어떻게 변했을까. 낯선 사람은 더 미시적인 차원에서 경제적, 사회적 질서를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21세기 초 중국 사회가 낯선 사람 사회의 더 깊은 낯성어짐, 곧 ’낯섦화‘라는 흐름을 격고 있다.’ 낯선 이에 대한 경향은 첫째 ‘무감각’ 둘째 고전적 의미의 근대적 상태에서 사람들은 낯선 이가 자신과 관계있음을 의식했다면, 오늘날에는 오히려 아는 사람이 자신과 무관하다고 느끼곤 한다. 결국 ‘낯섦화’는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낯선 존재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낯섦화’가 극한에 도달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낯섦화’의 상태에서는 고독과 방황 불안이 지속된다고 한다. 그는 이런 이유로 자신을 스스로 낯설게 여기기까지 한 ‘나는 낯선 사람이다’ 문제를 고민하고 탐구하자고 제안한다. 자신의 설 자리와 실천의 출발점을 찾는 사고방식을 탐색해 보고자 하며 이를 ‘안생식’사고라고 이름하였다. 안생식이라면 그냥 좋은 삶이라고 해보자. 그에게 안생식 사고란 ‘낯선 사람을 보고, 부근을 보고, 자신을 보고, 사회를 보는 것’ 이 보는 것이 존재의 기초이자 생활능력‘이다.
이 책은 영상으로 제작된 대하 시리즈를 엮었다. 굳이 책으로 낸 이유를 더 강한 머무름의 감각을 제공하고, 잠시 멈추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머무름은 구속이나 갈림길이 아니다, 머무름은 거주와 안정을 만들어내, 사고가 경험을 붙잡을 수 있도록 하고, 실제 세계에서 ’뿌리 내리는‘ 느낌을 갖게 한다” 저자는 이 책이 이론서가 아니라 실천서이자 실용서가 되길 바라며, 읽는 동안 즉 이 책에 거주하고 머물면서 실제 세계에 뿌리 내림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지침서이자 사용설명서가 되기를 바란다. 대화시리즈는 샹바오와 예술가 류사오동의 대화. /사람은 외모가 아니라 내적인 생활의 감각을 보아야 한다/. ’몰략 화원‘ 운영자 허와피와는 /우리가 두려워 하는 것은 친밀한 관계인가, 낯선 사람인가?/. 다큐멘터리 감독 리이판과 /조립 라인에는 역사가 없고, 사마터를 할 때만 있다/, 도시 활동가 류웨라이 대화는 /왜 낯선 화원은 우리에게 끼쁨을 주는가/. 동물원 원장 선즈쥔과 /동물원에서 동물을 본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 대화 시리즈로 구성되었다. 모두 낯선 사람 혹은 낯섦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사고를 한 것인가? 혹은 실천이나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거주와 안정이 없고, 사고가 경험에 기반하지 않고 고도의 추상성에 기대고, 실제 세계가 아니라 가상 세계가 더 편하고, 머무름이 없고 늘 부유하고, 사회가 없고 늘 고립된 개인만 있다면 인간은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을까. 만약 그렇다라고 생각한다면 부근의 복원은 현대 인간이 처한 고독과 불안과 고립을 설명할 수 있는 여러 처방 중 하나일 수도 있겠다 싶다. 샹바오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기후위기‘ 나 디지털 네트워크와 같은 거대 담론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미시적 접근을 시도한다. 우리의 일상과 경험의 세계에서부터 먼저 질문을 던지고 해결책을 찾아나선다. 나는 이런 시도가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둘지 아니면 흔한 ’행복학‘이나 ’자기 계발‘서 중 하나에 머무를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낯선 사람을 보고, 부근을 보고, 자신을 보고, 사회를 보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사실 샹바오의 기획은 거대한 ’사회 복원‘ 기획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샹바오는 이런 질문을 싫어하겠지만,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있을까? 인류는 지금 그런 기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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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가 들려주는 삼각비1 이야기>> 허인표 지음. 자음과 모음.
사회성이 부족하거나, 교류를 즐기지 않거나, 비교적 시간이 남는 사람들에게 수학을 공부하기를 권해본다. 처음에는 지루하고 재미없고 짜증이 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만약 당신이 수학에 뚜렷한 재능이 없으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수학을 공부한다면, 짜증은 내내 계속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한다면 가끔은 즐거움도 얻을 수 있으리라. 수학을 공부하는 것은 텃밭 가꾸기와 비슷하다. 한 번 심거나 가꾼다고 영원히 가거나 지속되지 않는다. 매년 매달 매일 새로운 작물을 심고 돌보고 수확해야 한다. 정성을 들인 만큼 보람이 있겠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보장할 수도 없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즐겨야 하리. 언제까지 나의 텃밭을 가꿀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런 심정으로 앞으로의 수학 텃밭을 대할 생각이다. 수학은 그렇고, 내게 주어진 이 삶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메마르면 물을 주고, 가뭄에는 하늘에 빌고, 홍수가 나면 나의 과오를 성찰하고, 남으면 다른 이와 나누고, 거름을 주며 정성스럽게 가꾸어 보야야 할 것 같다. 텃밭 가꾸기와 수학 공부하기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다르면서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아침에 들었다. 노모는 굽은 허리와 아픈 관절로 텃밭 고랑을 호미로 파며 ‘아이고’하며, 젊은 나는 분노와 슬픔과 회한과 무의미라는 호미로 글의 고랑에 엎드려 끙끙 앓는다.
프톨레마이어스는 서기 85년 경 그리스 사람으로 그들의 우주관과 기하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는 기하학 분야에서 새로운 증명과 정리를 만들었고, 천구면에 있는 점을 수평면, 자오선면, 수직면으로 구성되는 서로 직각인 3개의 평면에 사상하는 문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기하학을 공부하다 누구나 우주에도 적용해 보고자 하는 것 같다. 고대에서 기하학자는 천문학자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하늘을 거대한 평면으로 보고 기하학적 지식을 실험하거나 적용해 보았지 않았을까. 그가 천구면을 직각삼각형으로 구성하려고 한 것이 삼각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가장 기초적인 삼각비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몇 가지 사전 지식이나 전제가 필요하다. 바로 삼각비로 들어가는 방법은 적어도 수학에서는 없다. 우선 삼각형이라는 도형을 알아야 하고, 삼각형의 닮음 조건을 알고, 직각삼각형과 삼각비를, 좌표평면의 사분면을, 그런 연후에 삼각비를 이용하여 삼각형의 넓이와 높이 구하기를 할 수 있다고 한다. 가장 단순한 삼각비에 대한 것이라도 반드시 단계마다 과정을 생략할 수는 없다. 지름길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닮았다와 같다는 다르다. 삼각형이 닮았다는 의미는 각 변의 길이의 비가 같고 대응하는 각의 크기가 같으면 닮았다고 한다. 삼각형의 닮은 조건은 세 가지다. 1- 두 쌍의 대응변의 길이의 비가 같고, 그 끼인각이 같을 때.(SAS-S는 대응변, A는 끼인각) 2-세 쌍의 대응변의 길이의 비가 같을 때(SSS) 3-두 쌍의 대응각이 각각 같을 때(AA-즉 세 각이 같을 떄). 삼각비란, 세 각이 같은 삼각형이 닮은 삼각형이라 할 때, 직각삼각형에서 한 각이 직각이고 다른 한 각이 같을 때, 삼각형의 비가 일정하다. 이때 일정한 삼각형의 비를 삼각비라 한다. 즉 직각 삼각형에서 세 각이 같다면 삼각형은 비율이 같다. 직각 이외의 한 각을 기준으로 삼는다.(기준각) 삼각형은 세 개의 변과 세 개의 각이 있다. 그리고 기준각을 정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변을 구분할 수 있어서다. 높이. 빗변, 밑변을 정할 수 있다. 삼각비란, 직각삼각형의 변의 길이를 이용하여 삼각형의 변의 길이, 각의 크기 등을 구하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SINA=높이/빗변. COSA=밑변/빗변. TANA=높이/밑변. 기준각의 각도에 따라 이 세 삼각비의 값을 다 정리해 놓았다. 즉 각이 결정되면 삼각형의 크기와 무관하게 삼각비는 항상 같은 값으로 고정되어있다. 그렇기에 한 변의 길이와 각만 알면 빗변과 높이를 알 수 있다. 비율이 같으니까. 화학에서 주기율표와 같다. 이것을 이용하여 삼각형의 높이와 넓이 등을 구할 수 있다. 아주 높은 건물의 높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자를 가지고 위에서 아래까지 내려서 잴 수도 있다. 그러면 모든 건물의 높이을 이런 식으로 계측할 수는 없다. 이때 건물에서 20미터 떨어져서 건물 꼭대기까지 직각삼각형을 만들고 그 각이 60도라고 하자. 각 꼭지점을 ABC로 하는 직각 삼각형이 만들어진다. 그러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기준각과 밑변의 길이다. 이것을 이용하여 높이을 알 수 있다. 밑변이라 TAN는 높이/밑변이고, 각은 60도이다. TAN60=높이/20이다.(높이를 AC↓) 그럼 AC↓=20*TAN60이다. TAN60의 삼각비는 루트3이다. 해서 20*루트3. 루트3은=1.732--. AC↓=20*1.732--. 높이는 34.64이다. 달과 지구가 수직이고, 달까지의 길이를 알 수 있다면 태양까지의 거리도 알 수 있다. 삼각형의 넓이 공식은 S=½absinC라고 한다. 삼각형을 우선 직각 삼각형으로 만든 후에 삼각비를 이용하여 넓이를 구할 수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유레카이다. 쭉 나열하였지만, 막상 문제가 주어진다면 쉽지 않을 것이다. 연습과 반복을 통해 계속 익히는 수밖에 없다. 도시에는 건물이 널렸고, 주위에는 늘 산이 있고 평지가 있다. 높이가 있고, 넓이가 있다. 하늘에는 달이 있고 태양이 있고 별들이 분포해 있다. 우리가 굳이 저 높이를 알고 평면을 분할하여 넓이를 알 필요가 있을까. 태양과 달의 거리와 별의 분포를 알 필요가 있을까. 세상은 온통 소리로 둘러싸여 있다. 그 소리를 분류하고 질서를 잡아서 누군가는 음악을 만든다. 도시에는 사람도 많고 차도 많다. 일상이다. 일상이란 당연한 모양이다. 그들 수학자나 예술가들은 그런 따분한 ‘일상’, ‘당연한 것’에 의문을 가지거나, 파고드는 부류일까. 왜. 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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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 법구 지음. 한명숙 옮김. 홍익출판사.
남의 눈에 눈물 흘리게 하면 언젠가는 내 눈에 피눈물 흘릴 날이 올 것이다.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지옥에 떨어진다. 같은 뜻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내가 어려서는 어른들게 이런 류의 말들을 자주 들었던 기억이 있다. 당연한 격언 같지만, 인간 세상에서 이런 금언이 당연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인간의 노력이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 수학에서 음수가 발견되고도 음수를 수학적 수로 받아들이기까지는 1,600년이 걸렸다고 한다. 지금의 세태는 이런 격언이 낡고 오래되고 현실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리라. 차라리 요즘의 격언이란 성공하고 출세하면 최고의 선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와 개인을 중시하고 성공과 경쟁을 장려하는 산업화 사회의 처세는 이렇듯 다를지 모른다. 법구경은 부처님 사후에 불교계가 다섯 부파로 나뉘고 거기에 소속된 부파들이 각각 자신의 입장에서 여러 경전 중에 네 구절과 여섯 구절로 된 게송을 뽑아서 만든 경이라고 한다.
저자는 옮긴이의 말 말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이 구절을 매우 좋아한다. “죄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남의 덕인데, 꿋꿋이 고개 든 허세의 슬픔, 아픔에 가슴이 사무친다. 내색하지 않고 속아주는 사람들 모두에게 감사할 뿐이다” 이 치열한 성공 지향 사회에서 이런 말이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법구경이 읽을 가치가 있을까. 회향품. 5장 몸이 병들어 야위어 가는 것은 활짝 핀 꽃이 떨어지는 것 같고. 죽음이 찾아오는 것은 여울에 휘감아 도는 물살 같구나. 질병과 죽음과 가난과 슬픔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인연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떻게든 죽음을 피하려 하고, 질병을 극복하려 하고, 가난을 벌레 보듯 혐오하고, 슬픔이 행복이 되지 못해 좌절하고 절망하는 사회에서 가능할까. 사실 쉽지 않은 일이리라. 그러나 태어나고 병들고 아프고 죽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간들의 운명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을 회피하고 노력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흔히 ‘건강한 노년’이라는 말들이 유행하는데, 사실 건강한 노년은 없다. 건강과 노년이란 어불성설이다. 건강하면 노년이 아니다. 아프고 질병이 걸리고 기억력도 감퇴하고 곧 죽음이 임박했기에 노년인 것이 아닐까. 우리 인간들은 이런 용어라도 만들어서 노년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장식하기를 원하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생로병사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짊어진 인간이 어떻게 세상을 해석하고 받아들여야만 대자유를 얻을 수 있을까. 아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자칫하면 불교는 허무의 사상으로 흐를 위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부지런히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정진하라고 가르친다. 훌륭한 선수가 되기 위해 부지런히 훈련하고 공부하라는 의미와 상통하지 않을까. 다만 운동선수의 무대는 경기장인 반면 한 인간의 무대는 생로병사가 일어나는 ‘삶’이라는 무대이다. 이 ‘삶’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유를 얻고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불교에서는 지도자나 멘토가 아니라 오직 너를 믿고 정진하라고 하는 듯하다. 정말로 선을 행하면 복을 얻고, 악을 행하면 죄를 받는걸까. 복이나 죄를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선은 좋은 것이고, 악은 나쁜 것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마음이 심란할 때 법구경을 간간이 읽는다. 처음 읽을 때는 ‘아가, 착하게 살아라, 남들 눈에 눈물 흘리게 하지 마라’ 하는 할머니 말씀처럼 들렸다. 시시하게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을 선하게 살아라’ 하는 말 보다 더 중요하고 바른 말씀이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되뇌게 된다. 나는 오늘 선하게 살았나 하고 묻게 된다. 나는 믿기로 하였다. 악하게 사는 것보다 선하게 사는 것이 더 좋다고. 그럼 선이란 무엇이고 악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는 인간의 정신사나 윤리에서 누천년에 걸친 논쟁거리인지도 모르겠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선이다. 부처가 선의 법을 규정하였다. 그럼 누구나 자기가 선하게 살고 옳게 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시대는 그런 시대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나의 선과 너의 선이 부딪쳐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는 세상이다. 선은 각자가 규정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도로에서 운전할 때 교통신호를 각자가 마음대로 규정하여 운전하지는 않는다. 누군가가 혹은 사회에서 정한 교통 규칙을 준수하며 운전한다. 각자가 질주의 본능과 자유를 위해 교통규칙을 어기기 시작하면 운전자는 사고에 대한 불안과 긴장 속에서 남과 다투면서 운전을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교통 규칙을 잘 지키며 운행한다. 그런데 정신이나 마음처럼 무형의 영역에서는 마음껏 질주하고 자유를 맘끽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세상은 혼란스럽고 우리는 늘 긴장과 불안에 시달린다. 현대의 가장 대표적 질병은 우울증이라 한다. 부처님은 사상이나 정신의 교통 규칙을 정한 자라고 한 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 그리고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불교하는 집단을 형성하였지 않았을까.
가끔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주고받을 때 내가 불교적 세계관에 많이 물들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내가 하는 말과 생각하는 방식 등이 그럴지도 모른다. 많이 읽지는 않지만, 가끔 불교의 경을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물들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내가 종교로서 불교를 대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나는 단지 사상으로서 불교를 대한다. 그리고 불교의 경을 가끔 읽는 이유는 부처의 가르침을 읽는 것이 즐겁고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기에 읽으리라. 뭔가 매력이 있다. 세상의 모든 책들이 그렇지만, 특히 무슨무슨 경이라 쓰인 책들은 반복하여 읽어야만 할 것 같다. 경은 이론서나 기술서도 아니고 문제집도 아니기 때문이다. 왜 그럴지를 짐작해 보면 경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내부의 문제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무수한 반복을 통하여 몸과 하나가 되어야만 비로소 경을 이해하고 읽을 수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무도인은 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무수한 반복 훈련을 통해 동작이 자연스럽게 몸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똑같은 발차기를 수만 번 훈련하여 몸과 하나가 되게 한다. 좀 더 그럴듯하게 표현하면 무슨무슨 경은 실천의 문제이지, 이해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구경을 읽을 때면 조급해하지 말고 반복해서 읽다보면 즐거움이 있다. 그렇다고 자구를 무조건 외운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해하고 의미를 하나씩 알아가면서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책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부처의 가르침의 만분의 일이라도 깨달아 대자유를 맛보지 않을까. 남들과 다투지 않고 욕망에 치를 떨지도 않고, 돈과 권력을 탐하느라 피로에 절지도 않고, 행복과 성공을 쟁취하고자 사투를 벌이지도 순간의 기쁨과 슬픔에 속지도 않고 담담하게 인연대로 살아가고 싶다. 모든 중생들이 안락하게 살아가기를, 내색하지 않고 속아주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를.
활 만드는 사람은 활을 다루고 뱃사공은 배를 다루며
목수는 나무를 다루지만 지혜있는 사람은 자신을 잘 다룬다.
명철품.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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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우의 세 자매>>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민음사
소설을 한 편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았다. 가끔 소설을 읽긴 하지만, 드물다. 천쓰홍은 대만 작가인데, 대만을 넘어 꽤나 유명한 작가라고 한다. 나는 그 이름도 한 번 들어보지 못했다. 정기구독하는 시사인 잡지의 문예란에서 소개되었기에 읽게 되었다. 요즘은 여러 책을 동시에 읽는 경우가 많다. 직장에서는 몇 달째 칼마르크스의 자본 1권을 읽고 있다. 직장에서 쉽게 틈이 없기에 속도가 더디다. 최근에는 법구경을 책상 모서리에 놓고 한 장씩이나마 들여다보고 있다. 며칠 전에는 기세춘, 신영복 선생이 편력한 중국역대시가집을 구매하여 들춰보고 있다. 책을 읽는 것이 힘도 많이 들고 내가 그닥 즐기는 것은 아니지만, 생계 활동 말고 따로 취미가 없기에 읽고 있다. 다른 것을 좀 배웠으면 좋았을 걸 그렇게 되지 못했다. 인간관계의 폭도 협소하고, 여행을 자주 간다거나, 맛집이나 다른 것에 흥미가 없기에 달리 방법이 없다. 혹자는 좋은 팔자라고도 하고 혹자는 가련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남들 시선이나 평가에 흔들리지 않는 나이가 되어서 그런지, 무모해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지금 이렇게 뭔가를 쓰고는 있지만, 이것은 몸에 익은 습관적인 행위이지, 이 소설에 대해 딱히 쓸 게 있어서 쓰는 것은 아니다. 많이 무기력해졌고, 때때로 공허감이랄까 허무의 감정이 많이든다. 그럴 나이가 되어서 그러는지, 괜시리 그러는지는 모르겠다. 물론 이유가 없지는 않겠지만, 이유를 찾은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원인은 끝도 없고, 핑계도 무한하다. 옛말에 처녀가 애를 가져도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것이 편하고, 옳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세상에는 사람 수만큼의 사연이 있는 법이고, 다들 자신의 사연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풍조가 아닌가. 이런 상태를 방치하고도 삶은 계속되겠지만. 좋은 방법은 아니다. 그래서 고민고민하다가 한 가지 처방을 내렸다. 이제부터는 습관의 힘으로 살아가자. 아침에 일어나 씻고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고 식사 후 산책을 하고 책을 읽고 쓰고 하는 것을 의도나 의지가 아니라 습관화하자. 내가 살아가는 힘은 점점 고갈되어간다. 대신 습관의 근육을 키우자. 직장을 그만둔다는 것은 생계 수단을 잃는 것이기도 하지만, 내 삶의 중요한 습관 혹은 의례을 한 가지 잃어버리는 일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패턴을 계속 유지할 수는 없다. 살아간다는 일은 내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기 때문이다. 사는 일은 습관을 지키고, 습관을 갱신하며 지속하는 물리적 사건이 아닐까. 지구라는 행성이 수억 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까닭은 중력과 공전과 자전의 습관의 힘이 아닐까. 지구라는 생명테가 매일 열정과 의지를 가지고 자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나는 읽어야 하고 써야 한다. 생물학에서는 물질대사이다. 나는 이것을 문학적으로 온고지신이라고 이름을 붙여본다. /자본론/을 읽다가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칼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쓴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기술했을 것이다. 책의 상당 부분은 그래프와 통계자료로 도배를 하였으리라. 그런데 자본론은 마치 이야기 같다. 그 이유는 당시에 아직 통계나 그래프 같은 수학적 방법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아서, 많은 것을 글로 풀어야 했지 않았을까 추론해 본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본론/은 철학적이고 인문학적이고 문학적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내용은 차치하고 읽는 재미가 있다. 신화나 무속은 우주나 인간을 설명할 충분한 수단이 없었기에 채택된 방식이 아니었을까. 번개나 폭풍이나 홍수를 설명할 과학이 부족하거나, 인간들의 삶의 부조리나 이해 불가한 사건을 해석할 지식이 부족하다면 나 또한 신화나 무속이나 종교적 설명의 방법을 발명하였으리라. 그렇다고 신화나 종교가 과학이 아니라는 이유로 배척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우리 인간들의 표현 방식이고 세계를 해석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이고, 지혜의 보고일 수 있다. 우리들의 삶은 방정식이나 그래프로만 설명될 수 없는 그 너머가 있지 않을까. 소설이라는 장르를 한 번 생각해 본다. 소설은 인간사를 글로 풀어내는 장르다. 언어의 예술이다. 한 때는 시가 언어의 예술로 더 높은 평가를 받는 시대도 있었지만, 지금은 시라는 장르가 사라져가고 있다. 소설도 시의 운명을 따르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 지위는 날로 쇠퇴해 가리란 예측은 대부분 동의하는 것 같다. 지금은 보는 시대이지, 읽는 시대는 확실히 아닌 듯하다. 소설이라고 모두 읽는 용도라고 생각할 수만은 없다. 점점 보여주기 위한 소설이 새로운 표현양식이 되어가고 있지는 않는가. 읽는다는 행위는 뜨게질 같은 수작업이 아닌가도 싶다. 내가 가끔 소설을 읽는 이유는 무슨 교훈을 얻기 위함도, 삶의 지혜, 정보, 즐거움을 위함도 아니다.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시간 낭비다. 뜨개질을 한다는 심정으로 읽는다. 뜨개질의 습관을 이어가기 위함이다. 가야 할 곳도 많고, 보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많다고 하지만, 이리저리 휩쓸리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습관, 패턴, 의례.
<셔터우의 세 자매> 타이완의 중부의 실제하는 한국의 군 단위 정도의 지역이라 한다. 여기 이상한 세 자매와 그들의 이웃들이 있다. 그들이 살아가는 이상한 이야기고, 셔터우도 이상한 지역이다. 거기에는 역사가 있고, 신화가 있고, 무속이 있고, 비루한 인간 군중이 있고, 매일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 그렇게 그들은 태어나고, 살아가고, 싸우고, 속이고, 위선 떨고, 죽는다. 또 태어나고 죽고 이상한 행동들을 하며 살아간다. 소설을 어떻게 평가하고 감상해야 하는지 알 수 없기에 이렇게 밖에 쓸 수 없다. 내 감정을 하나 더 얹어보아야 그것이 무슨 객관적 관점일 수도 없고, 너절한 감상을 적어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또한 ‘보편적’이라는 의미가 그 의미를 잃어버린지 오래인데, 굳이 ‘보편적’ 인 무엇을 찾으려고 괜히 노력해 본들 무순 소용이 있겠는가. 다음에 또 소설을 읽을 기회가 생기면 천쓰홍의 소설을 꼭 다시 읽어보고 싶기는 하다. 즐거운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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