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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포크라테스가 들려주는 작도 이야기>> 정수진 지음. 자음과모음.
작도란 가장 기본 도구인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만을 이용해서 어떤 조건에 맞는 도형을 그리는 것을 말한다. 얼핏 생각해 보아도, 도형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구성요소는 선분의 길이와 각도다. 눈금 있는 자와 각도기가 있다면 도형을 그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작도는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만을 사용하여 그리는 것을 작도라고 한다. 눈금 없는 자는 길이를 알 수는 없고 선분을 그리거나 연장하는데 만 사용할 수 있고, 컴퍼스는 선분의 길이를 옮기거나 원을 그리는데 사용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그리스인들은 계산하는 활동과 지적인 영역을 분리하여, 계산을 단순 육체노동이라하여 천대하였다고 한다. 작도를 계산이 아니라 지적 영역에 포함시키기 위해 계산 도구인 숫자를 제외시켰다고 한다. 작도 문제를 계산 문제가 아니라 단순하고 조화로운 그래서 미학적으로 매력적인 문제로 만들고 싶은 그리스인들의 소망이 담겨 있다고 한다. 그리스의 시민 계급(귀족)들은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일은 노예 계급들에게 맡기고, 그들은 지적이고 미학적인 담론에만 열중한 모양새다. 경제적 기반이 뒷받침 되었던 그들은 학문과 정치에 치중했던 듯 하다. 그들에게 학문은 적어도 실용적인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철학이나 인문학이 실제적이고 실용적이지 않다고 천대받는 지금과는 학문에 대한 태도가 다른가 보다. 내가 가끔 수학책을 읽는 이유는 실제적인 필요나 계산을 위한 읽기는 아니다. 어찌보면 그리스 귀족 같은 목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귀족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왜 수학책을 들여다 보고 있을까?
이 책은 일곱 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다. 1, 2, 3장은 부지런히 읽었고, 나머지 장은 한 번 훑어보았다. 앞 세 장은 그나마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 내용은 지금 들여다본다고 알 수가 없었다. 좀 더 노력하면 약간의 성과가 있겠지만, 오늘은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놀이다. 설명을 눈으로 따라가기보다 직접 작도를 해보기로 하였다, 눈금 없는 자 대신 나무 막대를 이용하고, 컴퍼스는 문구점에서 한 개를 구입하였다. 컴퍼스를 앞으로 사용할 일이 없겠지만 놀이를 위해 이 정도 도구 하나쯤 장만해도 될 듯 싶었다. 아주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 자유무역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저자는 작도을 재미있게 가르치기 위해 보물찾기 놀이 방식을 이용하여 과제를 낸다. 일테면 /두 나무의 수직 이등분선 위에만 마른 땅이다. 마른 땅을 밟고 늪을 지나 바위 밑을 파보시오/ 식이다. 우선 수학을 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수학적으로 나타내야 한다. 두 나무는 A 와 B로 나타내고 A와 B를 연결하는 선분을 그리고 그 선분 위의 수직 이등분선을 찾아내면 된다. 개인적으로 수학을 하면서 실제적으로 도움받는 부분이 있다면 이런 것이다. 물론 아주 미미하다. 즉 어떤 실제적인 문제를 만났을 때 관계나 감정이나 서사의 늪에 빠지지 않고 수학적 도식이나 구조적 접근을 해보는 식이다. 이럴 때 문제의 중심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보일 때가 있다.
나무막대와 컴퍼스를 가지고 저자가 설명하는 순서대로 백지 위에 작도를 해보았다. 몇 번의 실패 후에 작도를 할 수 있었다.선분의 수직이등분선 작도, 각 옮기기 작도, 각의 이등분선 작도, 직선 밖의 한 점에서 직선에 수선 긋기을 하였다. 기본 작도를 배우고 삼각형의 작도 방법을 배웠다. 우선 삼각형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일치해야 한다. 1-세 변의 길이가 주어질 때, 2-두 변의 길이와 그 끼인각이 주어질 때, 3-한 변의 길이와 양 끝각이 주어질 때. 위 세가지 조건이 맞지 않으면 세상에 그 어떤 삼각도형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삼각형 작도란, 이 세 가지 경우가 주어졌을 때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만을 이용하여 삼각형을 완성하는 작도 방법이다. 저자가 가르쳐주는 대로 따라서 작도를 하였지만, 책이 없이 문제가 주어졌을 때 다시 작도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금방 까먹어 버린다. 하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찾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할 수는 있을 듯하다. 한 번에 목적지에 도착하면 좋겠지만, 나는 이제 겨우 걷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하는 단계다. 걷기만 한다면야 언제가는 도찯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도착하지 못하고 평생 헤매기만 한다고 속상해 할 일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걷는 것을 즐기면 되지 않겠는가? 저자는 7가지의 기본 작도를 제시한다. 이 7가지를 익히면 다음 단계로 도약할 수 있는 근육이 생기리라. 나의 작도 공부는 여기서 일단 멈추기로 한다. 나머지 장은 제목만 옮겨 본다. 4장.황금 사각형, 은직사각형, 정다각형 작도. 5장 3대 작도 불능 문제. 1-임의의 각을 삼등분하는 작도 2-부피가 두 배가 되는 정육면체 작도 3-일정한 원 넓이와 똑같은 넓이를 가진 정사각형 작도. 이들이 계속 불능으로 남을지 인간의 노력으로 풀릴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불능이라 한다. 6장 면적의 전환. 7장 히포크라테스 초승달. 다각형이 아닌 곡선 모양도 면적 전환이 가능한가? 하여간 오늘 하루도 잘 놀았다. 내일은 어떤 수학을 접할 수 있을까. 약간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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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야로 읽는 반야심경>> 이중표 역해 불광출판사
의견만을 쫓다 보면 늪에 빠진다. 의견들은 세상 사람들 수만큼 풍성하지만, 이론은 외면 받고 있다. 바다의 일렁임과 풍광도 좋지만, 바다 그 근원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일본 작가 미야자와 겐지의 책을 읽었다. 그가 법화경을 좋아한다고 하여 곁들여 읽었다. 전부터 불교 경전이나 그 언저리의 책을 잠깐씩 읽은적이 있지만, 갈증은 더 심할 뿐이다. 모두 에피소드이거나 의견에 의견을 보탤 뿐이었다. 앞에 놓인 수많은 방정식을 풀지만, 공식을 외워서 풀이하는 식이지 원리에 대해서는 늘 무지하였다. 우연히 이중표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어느 정도 갈증을 해결할 수 있었다. 운이 좋은 셈이다. 모든 책이나 주장이 가치가 있지는 않다. 우리네 삶처럼 사기, 기만, 거짓이 책의 세상에서도 똑같이 있기 마련이다. 책이라고 신세계가 아니다. 구세계의 유물이며 현실태를 반영한다.
반야심경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약어다. 마음 心자가 들어가서 무슨 마음에 대한 경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지만, 심은 핵심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풀이해 보면 피안으로 가는 지혜의 핵심 경 정도라고 한다. 피안이란 장소나 세계의 이동이 아니라, 깨달음을 이르는 개념이라 한다. 현존하는 반야심경은 8종이라 한다. 가장 많이 인용되는 심경은 구마라집 역, 현장 역 심경이라 한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8종이지만 내용은 대동소이라고 한다. 저자는 <니까야>와 <아함경>을 통해서 <반야심경>를 해석하였다고 한다. <니까야>, <아함경>은 부처님이 가르친 초기 경전이라고 한다. 불교라는 종교의 초기 경전을 통해 그 후 경전을 해석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우선 올바른 접근 방법이다. 세상 모든 것에 부처라는 이름을 도용할 수는 없으니까. 도대체 부처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하고 먼저 물어야 한다.
구마라집의 반야심경의 첫 문장은 이렇다. /관세음보살은 깊은 반야바라밀을 실천하면서 오음이 공임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고액을 벗어났다오/. 반야심경은 260여 자라 한다. 이것이 결론이고 나머지는 결론에 대해 주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즉 이 한 문장이 반야심경의 핵심이라고 한다. 300여 쪽의 이 책은 260여 자에 대한 해석이다. 반야바라밀은 뭐고, 실천은 뭐고, 오음(온)은 뭐고, 공은 뭐고, 일체란 뭐고, 고액은 뭐고, 벗어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단 한 자도 허투루 쓰이지 않았다고 생각해야 한다.
나도 두 번을 정성 들여 읽었기에 의견을 보태고 싶지만, 부질없는 짓이란 생각이다. 무엇을 보태고 뺄지도 모르겠고, 읽을 때는 낮이더니, 지금 다시 까만 밤이 되어서 천지 분간을 할 수가 없다. 이중표의 해석을 따라가기도 버겁다. 그의 해석을 간단히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려고 한다. 소개라고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을 나열할 뿐이다. 반야심경은 佛母로 칭해지는 자비의 화신인 관세음보살이 지혜를 의미하는 반야바라밀다를 설하는 경이라고 한다. 부처의 가르침의 두 축은 자비와 지혜라고 한다. 4장 세간의 실상을 알면 괴로움이 사라진다. 오온을 관찰하여, 그것의 자기 존재성(자성)이 공이다. 이것이 세간의 실상이다. 그럼 세간이란, 오온에 사라잡혀 자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오온은 색수상행식이다. 오온은 지각활동이라고 한다. 인간은 지각에 사로잡혀 마치 그것을 자기 존재라고 믿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은 공임을 깨달을 때 괴로움이 사라진다고 한다. //모두 인연에 따라서 순간순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생각일 뿐 실체가 없이 텅 비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러한 ‘자아’로 인해서 생겨난 모든 괴로룸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불교에서는 늘 이 자아라는 망상이 문제가 되는 듯하다. ‘자아’가 괴로움의 원인이다. 자아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자아는 원래 없는데 우리들이 이 망상을 붙들고 있기에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5장 나와 세계의 실상은 공이다. “업보는 있으나 행위자는 없다” 저자는 공의 제일 중요한 의미라고 한다. 공, 무아, 업보, 연기, 무아 등은 불교의 중요한 개념인데, 사실 같은 의미의 연관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불교의 공과 무아는 이와 같이 자아는 없고 업보만 있다고 한다.. 불교의 무아와 공은 업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인연이 곧 업보라고 한다. 즉 세계의 실상은 인연의 연쇄라고 하는 듯하다. 우리는 인연의 연쇄 상에 있는 것이지, 자아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보는 나는 나타날 때 오는 곳이 없고, 사라질 때 가는 곳이 없다// 쉬운 듯 하지만, 어렵고 심오한 말이다. 세상 사람들이여! 실상이 이렇거늘 무슨 ‘자아’ 타령을 하며 괴롭다고 난리치는가 하는 듯도 하다.
6장 중생이 곧 부처다. 자기존재성이 없는데, 무슨 부처가 있고 중생이 따로 있겠느냐고 한다. 중생이나 부처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에는 불교적 생명관이 자리잡고 있는 모양이다. 저자는 생명은 명사로 표현되는 존재가 아니라 동사로 표현되는 삶이다. 생명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과의 연결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생명을 개별적인 존재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우리 몸은 죽지 않는다, 우리 개개인은 보다 큰 인류라는 생명의 구조에서 보면 하나의 세포와 같다고 한다. 큰 생명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갈 뿐이라고 한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할 뿐이다. 어찌보면 죽음이란 한 개체의 끝이 아니라, 인연의 연쇄일 뿐이라고 하는 듯하다. 7장 공성을 깨달으면 망상이 사라진다. ‘중생들은 인식하는 감각기관과 인식되는 대상 속에 어떤 실체가 머물고 있다고 착각하고 살아가는데/ 이런 착각이 망상이라고 한다. 어떤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망상도 사라진다. 8장 강을 건넌 후에는 배를 버린다. //무명이 없고, 무명의 소실이 없으며, 내지 노사가 없고, 노사의 소멸까지 없다오. 고집멸도가 없고, 알아야 할 것이 없고, 얻을 것도 없고, 얻지 못한 것도 없다. //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이것이 나타나면, 저것이 나타난다// 강을 건넜으면 그 배는 버려라. //이것은 나의 소유가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9장 열반은 수행의 종점이 아니다.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이 살아간다// 열반이 다른 세계도 아니고, 천국과 같은 다른 장소도 아니다. 그냥 여기에서 마음에 걸림이 없이 살아가는 전부다. ‘해탈하여 살아가는 일상의 삶’.
우리의 언어 습관은 나는 본다 라고 한다. 여기에는 보는 나가 있다는 의미가 있다. 즉 보는 내가 있고, 보여지는 대상이 있는 듯한 착각을 인다. 불교의 업보(인연)은 독립적으로 보는 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보고 있는 나가 있을 뿐이다. 즉 명사로서 내가 아니라, 지금 보고 있는 중인 나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 산에 살면 산에 살고 있고, 강에 살면 강에 살고 있고, 바다 속에 있으면 바닷속의 있을 뿐이라고 하는 듯하다. 나는 도시에 살아야 하는 데 산에 살고 있다고 자신의 괴롭히지 말라는 의미로 들린다. 지금 산에 살고 있구나. 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수 있다. 그렇다고 불교가 ‘허무’를 설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걸 깨닫기 위해서는 더 많이 읽고 더 수행해야 한다. 보는 나, 듣는 나, 해엄치는 나 만 있을 뿐이다. //행위자로서 자아는 없고, 오직 업보만 있을 뿐이다// 여기에 불교의 대자유가 있을까? 천국도 없고, 영원히 변화지 않고 지속하는 영혼도 없고, 나라는 자아도 없고, 영적 지도자도 없고, 잃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고, 세간의 실상이 공이라고 깨닫고 살아가는 삶이 가장 큰 행복이라는 불교의 가르침.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이것이 나타나면 저것이 나타난다” 그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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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충지가 들려주는 원 1 이야기>> 권현직 지음. 자음과 모음.
오랜만에 수학 이야기를 들춰본다. 절반 정도 읽다가 한참을 묻혀두었다. 이 시리즈물의 대부분은 어려운 내용이 아니다. 그럼에도 수학을 읽는 것은 매번 주저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여행을 가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집을 나서는 행동이다. 집을 나서기만 하면 여행의 반 이상은 된 것이다. 매일 밥벌이를 위해 나서는 길도 우선 집을 박차고 나가는 일이다. 어떻게든 출근만 하면 출근이 완성된다. 나 같은 게으른 사람이 책을 읽는데 가장 장애는 우선 책상에 앉는 데 있다. 일단 앉기만 하면 얼마 정도는 읽을 수 있다. 집을 나서거나 책상에 앉는 행위는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상당한 모험이 아닐까 싶다. 바로 익숙한 세상으로부터 낯선 세계로의 진입이다. 안전한 집에서 근무처로, 따뜻한 침대에서 딱딱하고 차가운 의자로의 도약이다. 그런 이유로 수학을 읽는 것을 매번 주저하였지 않았나 싶다.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으로 가야하는 여정이었던 셈이다. 수학은 개념도 용어도 낯설고 사고하는 방식도 전혀 다른 세계다. 평생 수학이 익숙한 장소가 되지 않을 듯 하지만, 가끔은 낯선 장소를 배회할 생각이다. 낯선 곳에서 익숙한 곳을 바라보기를 포기하는 순간 책읽기도 그 기한을 다하리라. 도서관에 가면 <뉴턴> 이나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잡지를 들춰보곤 한다. 거기에 나온 과학이나 자연에 대해 내가 알 수는 없지만, 그냥 들여다 본다. 기웃거려 보는 것이다. 앞으로 수학 이야기도 이런 식으로 기웃거려 볼 생각이다.
조충지는 1600여 년 전 중국 남북조 시대 수학자라고 한다. 오랜만에 서구의 인물이 아니라 아시아의 학자가 등장했다. 지금은 과학이고 수학이고 ‘서구’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원은 평면에 있는 한 점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점을 연결하여 만든 도형이다. 그러면 원의 길이는 얼마일까. 이것을 원주의 길이라고 한다. (지름의 길이)×3.14 다. 3.14는 π라고 표기한다. π를 원주율이라고 한다. 그럼 원의 넓이는 반지름의 길이를 r이라고 하며, 원의 넓이를 S라 하면. S=π*r² 이다. 원주율은 원의 둘레와 지름의 비율이라고 한다. 즉 원의 둘레는 지름의 3,14---이라는 의미다. 원의 넓이는 원을 사각형으로 잘게 나누어 구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충분히 설명하였는데 나는 아직 어렵다. 원주율을 알아내려는 시도는 수천 년 전부터 계속되어 왔다고 한다. 지금도 원주율은 근삿값으로 계산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3.141592-------와 같이 소수점 아래로 어떤 규칙도 없이 계속 나열된다고 한다. 수학이 얼마나 지난한 노력과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책에 소개된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고대 그리스 아르키메데스는 정96각형을 이용하여 원주율을 계산하였다고 한다. 당시에 십진법도 사용하지 않았고, 계산에 필요한 기호도 없었다고 한다. 초인적인 집념과 수학적 재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AD300년 중국 유휘는 처음 정192각형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나중에는 정3072각형을 사용하여 3.14159까지 구해냈다 한다. 정3072각형 이라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다각형을 이용하여 파이를 구하는 방법은 2000여 년이 지나도록 계속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7세기에 영국의 그레고리가 분수를 이용하여 구하는 방법을 만들었고, 이후 원주율 구하기는 뉴턴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럼 왜 수학자들은 원주율에 그렇게 집착했을까? 원이라는 도형의 성질을 알기 위해서는 원의 길이와 지름의 비율이 가장 중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에서 원의 길이, 원의 넓이 등이 구해질 수 있었다. 이후 같은 둘레를 가진 도형 중에 넓이가 가장 큰 도형은 원이다. 자전거가 움직일 때, 바퀴의 한 점의 위치를 연결하면 곡선이 나오는데 이 곡선을 사이클로드라고 한다. 사이클로드를 알면 원의 운동 거리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원을 이용한 정다각형을 만드는 방법, 굴림대와 도르래의 이용 등등.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사소한 생활용품부터 첨단 과학까지 그 적용 범위를 확장하였다고 한다. 작아 보이는 어떤 제조품에도 사실 이런 원리가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소위 ‘인문학’에서도 비슷하다. 지금의 ‘상식’이 ‘상식’이 되기까지는 수많은 ‘원리’들이 있었을지 모른다.
/컴퍼스를 이용하면 지름이 1인 원은 쉽게 작도할 수 있다. 그런데 눈금이 없는 자와 컴퍼스를 이용하여 이 원의 원주와 길이가 같은 선분을 작도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2000년 전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 시작하여 수학자들을 괴롭힌 문제였다고 한다. 1882년이 되어서야 독일의 린데만이라는 수학자에 의해 작도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마의 문제라고 한다. 수학은 가능한 것도 증명해야 하지만 불가능도 증명해야 한다. 수학 혹은 학은 왜 이런 쓸데없이 보이는 것에 노력을 아끼지 않는 걸까? 거기에 인류의 역사가 담겨 있다. 그것이 인류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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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와 겐지 전집 1. 2>> 미야자와 겐지 지음. 박정임 옮김. 너머
설 명절을 무료하게 보낼 수 없어 두 권을 대출하였다. 전집은 3권까지 있었지만, 두 권만 빌렸다. 상당한 분량의 전집이다. 기어코 두 권 모두를 읽을 예정이었는데, 늘 하던 대로 날짜를 꽤 넘기고 말았다. 어느 작가나 작품을 알기 위해서는 단 권이 아니라, 여러 권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요즘 자주 든다. 하지만 순전히 무료하여 책을 읽는 내게는 쉬운 일은 아닌 듯 하다. 작가는 1933년 37세에 폐렴으로 사망하기까지, 창작과 농업지도의 헌신이 작가의 짧은 생애를 관통하는 중요한 과제였다고 작가 소개란에 적혀 있다. 미야자와 겐지는 시인이자 동화작가로 꽤나 유명하다고 한다. 꽤 오래된 작가인데 왠지 기시감이 들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을를 즐기지는 않지만, 이 전집을 읽다가 미야자와 겐지가 일본 애니메이션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보였다. 그의 묘사나 주제나 표현이 애니메이션과 유사하다는 느낌이었다. 애니메이션에서 표현하는 풍경이나 인물이나 주제 의식도 비슷해 보였다. 물론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미야자와 겐지라는 작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친구에게 전화하여 물어보았더니, 미야자와 겐지가 일본 애니매이션의 대표적인 작가라고 하였다. 그쪽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들은 한 번 정도 들어보았으리라 하였다. 과연, 그렇군. 뭐든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군 하는 감탄이 일었다. 작가가 불교를 좋아하고, 법화경을 애독한다고 하여 틈틈이 법화경이라는 불경도 같이 읽었다. 작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해 보였다. 작가는 자연을 정말 사랑하고 세상의 평화를 사랑하고 착하고 선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는 전문가가 아니라, 읽다보면 인간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비인간, 즉 산, 하늘, 숲, 나무, 동물, 등이 마치 인간처럼 묘사되고 있다. 인간과 동등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산도 하늘도 무지개도 하나의 생명체로서 이야기에 참여하고 있다. 그것들은 대상이 아니라, 이 세계에 주체로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작가가 사는 마을은 인간과 비인간, 유기체와 무기체가 공존하는 세계다. 늘 인간이 주체이고 나머지는 대상이거나 객체로만 보던 나의 사고가 얼마나 세계를 편협하게 보고 있고, 세상을 핍진하게 만들고 있었던가 하는 자책이 들게 한다. 작가 이전에 착하고 선한 사람이 아니면, 이런 글은 쓸 수 없었을 듯 하다. 미야자와 겐지가 동화 작가로 소개되는 것에 반대한다. 아니 어쩌면 나도 어렸을 때는 세상을 이렇게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어 가면서 이런 평화롭고 조화롭고 대칭적인 세계를 잃어버렸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어른이 되어 간다는 일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서글픈 일임은 분명해 보인다. 온 세상을 잃고 단 하나의 세상을 얻어 아등바등하는 모양새다. 굳이 변명을 한다면, 동심을 버리지 않았으면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낼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어느 작가가 ‘그래도 사랑만이 희망이다’고 하였을 때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누군가 ‘자비를 베풀라’고 한다면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사랑하라’ 이 명령만큼 큰 가치가 있을까. 세상을 해석하고 설명하고 분석하는 방법이 너무 매력적이고 그 기법이 날로 향상되어 간다. 인간 세상이 복잡해지고 세상이 난삽해질수록 우리들의 이론이나 사고는 그만큼 복잡해질 것이다. 세상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팽팽 돌지만, 책도 그만큼 빙빙 돈다. 나는 요즘 들어서 자주 이런 생각이 든다. 근원으로 돌아가자. 기본에 충실하자. 도저히 세상을 따라잡을 수 없고, 세상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속도를 따라갈 수 없어서도 그렇지만,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회의가 들 때가 많다. 불교을 비롯한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자만큼 ‘자비’나 ‘사랑’이 범람하고 있다. 모두들 사랑과 자비를 내세워서 정신이 없다. 근원으로 돌아가서 한 번 찬찬히 되짚어 보자. 종교가 타락하면 초기 종교로 돌아가자고 하기도 하고, 매번 패하는 운동선수에게 감독은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자고 한다지 않는가. 순수하고 순박하고 대칭적인 동심으로 돌아가서 다시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자 하고 싶다. 미야자와 겐지를 숙제를 하거나, 과시용으로 읽거나, 다른 방식으로 읽지 말고 주문을 외우듯이 읽어보면 어떨까 싶다. 아무 생각 없이 반복하여 읽고 또 읽다 보면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반야심경을 평생에 걸쳐 읽다보면 우리는 어느새 부처 근처에는 도달할 수 있다지 않는가. 새파란 하늘, 빛나는 태양, 언덕을 달려가는 바람, 꽃의 향기로운 꽃잎, 꽃술, 풀의 부드러운 줄기, 이 모든 것을 받치고 있는 언덕과 들판, 두 아이의 벨벳 윗옷과 눈물로 빛나는 눈동자, 그 모든 것이 십력의 금강석이었습니다. 그 ‘십력’의 큰 보석이었다.
이 모든 ‘보석’들을 다 잃어버리고 나는 잘도 살아가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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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카렌 암스트롱 지음. 장병욱 옮김.
신이치 교수의 <녹색 자본>에서 이슬람의 원리에 대해 깊은 감동을 받아 내친김에 이슬람 관련 서적을 한 권 더 읽어보기 위해 선택한 책이다. 카렌 암스트롱은 전에 <축의 시대>라는 책으로 안면(書면)을 튼 사이다. 이슬람에 대해 전혀 무지한 상태에서 일 년 전부터 아주 드물게나마 한 두 권 정도를 읽어 보는 것 같다. 주류 “문명‘의 뻔한 헛소리에 지쳐서 다른 골목길을 기웃거려 보기 위함일까. 세계 인구의 20%를 차지할 만큼 큰 종교임에도 완전 무지하였다. 정상적 상황이 아니라 특이한 현상이다. 그 역사도 1,4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세계의 20%를 어둠 속에 감춰버린 셈이다. 주식으로 치면 완전 저평가된 주식이거나, 상장폐지 위기에 내몰린 주식 취급을 받은 셈이다. 과연 이슬람은 이렇게 저평가 받거나, 상장폐지 될 정도로 파산 직전의 종교이자 문화일까.아주 간단한 몇 가지를 나열해 보자. 이슬람은 테러와 폭력의 세력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이슬람의 문자적 의미는 평화라고 한다. 이슬람은 유일신 신앙으로 가톨릭, 유대교, 이슬람은 같은 아브라함를 시조로 한다. 이슬람 교리를 믿는 사람들을 무슬림이라 한다. 튿별한 명칭이 나이라, 이슬람 교리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무슬림들은 우리가 말하는 ’하느님‘, 영어로는 ’God’라는 말을 ‘알라’라고 한다. ‘알라’라는 다른 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슬람의 원조인 무함마드는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위대한 예언자에 불과하다고 한다. 모스크는 이슬람 사원이다. 성당이나 절과 같은 의미다. 초기 이슬람 교리에 대한 카렌 암스트롱 평가를 옮겨 보자. 알라는 정의, 평등, 그리고 연민의 정으로 상호 행동할 것을 명한다. 인류 평등주의다. 아랍인들은 군주제 사상에 찬성하지 않는다. 무슬림들이 엎드려 예배 보는 자세는 이기심과 자만심을 버리게 하는 교육적인 가르침이며, 알라 앞에서는 자신들이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일깨우게 하는 방법이다. 그들 종교의 의례일 뿐이다.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가난한 자들의 마음을 체험하고 공감하기 위해서 한 달 동안 금식을 하는 라마단을 행하기도 한다. 사회 정의는 이슬람의 중요한 미덕이다. 등등이다. 그 외다른 문화나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지 않고 공존을 중요시한다고 한다. 서구나 뉴스에서 이슬람의 여성 억압의 상징으로 히잡을 많이 보도하는데, 종교 중 여성 평등에 가장 개방적이고, 이혼을 가장 먼저 인정한 종교라고 한다. 히잡은 이슬람의 전통이 아니라, 가톨릭에서 차용한 복장이고, 서구와의 갈등에서 만들어진 전통이라고 한다. 그들의 교리집은 코란이며, 코란은 가장 간명하고 단순한 교리라고 한다. 눈에 띄는 대로 개략적으로 몇 가지를 옮겨 보았다.
책의 구성에 서문과 5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은 이슬람 초기, 2장은 이슬람 발전기, 3장은 이슬람 전성기, 4장은 이슬람 황금기, 5장은 고뇌하는 이슬람(이슬람의 미래)이다. 각 장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슬람도 한 사람이나 국가처럼 진화하고 변화하고 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동하는 ‘생물’로 보아야지 유물이나 화석으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취지다. 이슬람의 발전상이나 변화의 여정을 일괄하였지만, 내게는 아주 낯선 세계라 소개할 정도로 읽을 수 없었다. 단지 이슬람도 인류의 역사와 문명과 함께하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이구나 하는 정도로 읽었다. 나는 여기에서 저자가 서문에서 제기하는 관점을 약간 소개하고, 5장 고뇌하는 이슬람에 대해 몇 자 적어볼 수 있을 뿐이다. 몇몇을 인용하고자 한다.
//종교의 최대 모순이라면 종교의 개념은 현실과 무관한 초월적인 것인데 반해, 인간은 현실 세계 안에서만 신의 존재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우리의 신앙은 ‘현실’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종교가 천국이나, 저승이나 피안 등 초월을 이야기 하더라도, 그 종교를 믿는 인간은 현실 세계 안에서만 초월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실제 종교적 주장과 그것을 경험하는 인간들 사이에는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 간극을 극복하는 방법은 상상력이라고 한다. //인간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종교적이다// 현실 속에서 살면서 ‘천국’이나 ‘저 너머’를 상상하며 종교적이 된다고 한다. 이것이 대부분의 종교적 문법이라고 한다. 반면.
// 이슬람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신의 존재를 찾는다. 이슬람 경전인 코란은 무슬림에게 역사적인 사명을 부여한다.---무슬림 모두가 절대적인 사랑과 존경 안에서 살 수 있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이는 현실적으로 여러 정부 정책들과 종교의 교리가 떨어질 수 없는 이유가 된다//
단순하게 비교해 보면 종교가 ‘천국’이나 ‘저 너머’에 이상향을 제시한다면, 현실의 이상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세속의 일이고, 그 세속의 일은 광의의 ‘정치’가 하는 일이다. 해서 근대 ‘민주주의’ 제도는 초월적 세계와 현실적 세계를 분리하여 놓았다. 그런데 이슬람은 그 이상적 공동체를 현실, 즉 역사에서 형성하려고 하기에 정교분리의 원칙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한다. 타 종교는 하늘나라가 신성하지만, 이슬람은 인간 역사가 신성하다. 이런 교리를 가진 이슬람은 역사의 부침에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근대 사상이 정교분리 원칙인데, 이슬람은 ‘근대화’ 되지 못한 ‘미개한’ 종교라고 무시할 수 있지만, 그런 평가는 무지한 주장이다. 사실 ‘정교분리’라는 것도 하나의 교리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화’(자본주의화) 교리지, 무슨 절대적 법이 아니다. 이것이 표준처럼 보이는 것은 ‘정교분리’를 채택한 서구가 세계의 패권을 잡아서 다른 사회에 강제한 결과일 뿐이다. 이슬람 세계에 정교분리 원칙을 강제하는 것은 사실상 그들에게 이슬람을 포기하라는 주장일 수밖에 없다. 이슬람은 이런 면에서도 서구와 대척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좀 더 솔직해 질 수 있다면, 모든 종교는 현실의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왜냐하면 종교 활동은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진는 일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속에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적당히들 위선을 떨고, 서로 모른 체 할 뿐이다. 하지만 교리상으로도 그렇고,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슬람은 훨씬 더 솔직하고 직설적이고 단순한 종교가 아닐까도 싶다. 저자의 주장처럼 이슬람이 역사 안에서 이상적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종교라면, 아주 특이하고, 한편으론 매력적인 종교일 수 있고, 열정적인 종교일 수 있겠다 싶기도 하다.
//이슬람은 수세기 동안 무슬림의 양심의 선두에서 사회 정의, 평등, 관용과 자비의 개념을 지켜 왔다. 무슬림이 언제나 이러한 이상에 맞춰 산 것은 아니었으며, 종종 정치적, 사회적으로 제도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것을 달성하려는 투쟁은 수세기 동안 이슬람의 영성에서 나왔다. 서양인들은 이슬람이 건전하고 튼튼하게 되는 것이 그들의 이익에도 부합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코란과 샤리아에 어긋나는 폭력을 휘들러 온 극단적인 이슬람 분파의 형성은 전적으로 서양의 책임만이 아니다. 그럼에도 서양이 이러한 사태의 상당한 원인을 제공해 온 것이 사실이다. 새로운 밀레니엄에 이슬람을 좀더 정확하게 평가하려면, 모든 원리주의자의 기저에 놓여 있는 공포와 절망을 달래야 한다.//
저자의 마지막 결론을 인용하는 것으로 갈음한다. 이슬람의 미래는 세계적인 평화와 공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미래는 공포와 절망을 향해 달려갈까. 아니면 공포와 절망을 달래는 쪽으로 갈까. 자꾸만 비관적인 생각으로 기우는 것은 나의 염세주의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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